「순교 하십시오,그런 정신으로 견디십시오」「손양원 목사」
1. 신사 참배는 우상 숭배다.
손양원 목사는 7살 때부터 아버지 손종일 장로의 불같은 신앙을 통해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아 강직한 믿음을 소유하며 성장하였다. 11살 되던 1913년 칠원 공립 보통 학교에 입학했을 때 당시 일본은 이미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일본의 문화를 강요했으며 동방요배라 하여 그들의 임금인 천황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래서 모든 공공기관에서는 아침 조회를 철저하게 동방요배로 시작하게 하였다.
손 목사가 다녔던 칠원보통학교에서도 아침 조회 때 동방요배를 강요하였는데 11살의 어린 손 목사는 「모든 일에는 중하고 경한 이치가 있다. 국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무턱대고 동쪽을 향해 절하는 것은 명백한 우상 숭배다.」라 하면서 동방요배를 거부했다.
그후 경남 신학교에 재학하면서 10년간 전도사로 종사해오던 손 목사는 더 깊이 있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부산 지역 시찰 구역을 사직하고 34세 때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일본은 천황을 신격화하고 일본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하면 천황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여 감옥에 가두고 말할 수 없이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까지 구차하게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일본 신사에 자청하여 참배를 하였다.
가면 갈수록 일본의 억압은 더욱 심해졌고 이를 견디다 못해 결국 한국 교회는 일본의 무력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본 경찰 97명의 감시속에서 진행된 대한 예수교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닌 애국적 국민의식으로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하여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손 목사와 주기철 목사와 같은 불같은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신사참배는 분명 유일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일본 천황을 신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여 강력하게 이를 반대했다.
잔인한 일본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닥치는대로 감옥에 가두고 가혹한 매질과 견딜 수 없는 고문을 가하였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2.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다
전남 여천 나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한지 1년 후, 신사참배 거부죄로 여수 경찰서에 끌려가서 8·15 해방 때까지 만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손 목사는 여수 경찰서에서 10개월간 미결수로 있으면서 형사들의 모진 심문과 협박, 회유에 시달리다가 결국 몸이 쇠약해져 검사 앞에 불려갈 때도 들것에 실려 다닐 정도로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극도로 쇠약해진 건강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할 기회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철저한 신앙 탓에 일본 경찰이 10개월간 문답한 것을 5백여 쪽의 조서로 작성해서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감옥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수 경찰서에서 미결수 생활을 마친 후 1년 6개월의 형을 확정 받고 광주 형무소로 가서 복역했다. 굽히지 않는 그의 철저한 신앙탓에 10개월간 경성 구금소를 거쳐 청주 구금소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고생이 가장 심했다.
눈만 뜨면 같은 방에 갇혀있는 죄수들에게 전도하자 결국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외로움은 둘째치고 뼈마디까지 얼어붙는 계속되는 추위로 동상에 걸려 손톱, 발톱이 짓물러지기도 했으며, 말 안듣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인 곶감만한 감식밥으로 인해 영양실조에 걸려 시력을 상실할 정도까지 이르렀다가 믿음의 누이가 보낸 간유로 회복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5년동안이나 모진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손 목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 여겨 무기력해지거나 나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통해 더더욱 단련된다며 고난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꿋꿋이 신앙을 지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였다.
한편, 손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그의 가족들 역시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위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가정을 없애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애양원 나환자를 돌볼 때에도 함께 열심을 냈었고, 손 목사가 감옥 생활을 할 때도 남편의 육신적 삶을 염려했던 것이 아니라 당할 고초로 마음이 약해져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진 않을 까를 염려했었던 보이지 않는 큰 힘의 내조를 하였다.
결국 손 목사는 해방되기까지 만 5년을 감옥에서 피가 터지고 살이 찢기고 사지가 뒤틀리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유일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를 범치 않았다.
3. 나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다.
해방과 함께 그는 마침내 승리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일은 교단 총회가 아닌 몇 몇 믿음의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져 1945년에 이르러서는 보배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2백개의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명의 순교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애양원 교회에서 1200여명의 나환자들을 돌볼 때에도 손 목사는 손이 꼬부라지고 얼굴이 문드러지고 눈썹이 빠지며 부모와 가족, 사회로부터 냉대받아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그들과 하루 거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충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들은 보통 나환자들보다 훨씬 중하여 손가락도 없고 얼굴도 일그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진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으나 그들을 관심과 사랑으로 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침이 나병 환부에 좋다고 하여 환부에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서슴치 않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4. 여순 반란 사건에서 두 아들을 잃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20일 순천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반란군의 손에 의해 무법 천지가 되었고 학생들은 좌익 학생들과 우익 학생들이 팽팽하게 대치하고있었다. 좌익 학생들은 철저한 반미주의자로 미국을 싫어하는 만큼 기독 학생들을 친미파라 하여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처형 대상 1호로 삼고 괴롭히다 결국 죽였다.
일주일에 불과한 여순 반란 사건으로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게 된 충격과 비통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을 양자로 삼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그 영혼 또한 구원시켰다.
손 목사는 아들의 영결식 때 다음의 9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첫째,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감사.
셋째, 4남3녀의 7남매 중 가장 아름다운 장남·차남을 하나님께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의 순교리요 감사.
다섯째, 예수 믿다가 종신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전도하다가 순교당함이리요 감사.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중이던 아들, 더 좋은 천국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일곱째,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것으 로 믿어지니 감사.
아홉째, 이같은 역경속에서도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끝으로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렸다.
5. 영광스러운 순교를 하다
그 후 2년 뒤 6.25 동란시 피난을 갈 수 있었던 기회 속에서도 나환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지 못했다. 「주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라며 예수 이름으로 순교하자는 마지막 설교를 남기고 나환자들과 함께 하다가 공산당들에 의해 체포, 감금된 후 그들의 총살 순교로 4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예수를 제대로 믿기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에 비해 오늘날과 같이 복음 전하기 쉽고 편한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처럼,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목숨을 던져 끝까지 오직 유일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던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