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 “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사람과 동물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뛰어 넘을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 예배”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사람 외 어떤 생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릴라가 비록 사람처럼 감정을 표현하고, 간단한 수화를 사용해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비슷한 사회 체계를 가졌다할지라도, 어떤 신적인 존재를 향한 경외감을 가지고 예배하는 감각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원주민들은 그들이 아무리 미개하다 할지라도 돌무더기라도 쌓으며 “예배” 할 대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죽음으로가 끝이 아님을 사람은 알기에 피라밋을 쌓기도 하고, 죽은 시신을 강물에 띄어 보내기도 한다.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그 마음, 사람에게만 있는 그 마음, 성경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성경은 사람과 동물을 흙으로 지었다고 말한다. 과학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원소 기호(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산, 칼륨, 칼슘, 마그네슘, 황, 규소, 철, 붕소, 망간, 아연, 구리, 몰리브덴. 등 )가 흙과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흙만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 넣으신 “생명의 기운”은 히브리 원어로는 “ 루아흐” 로 쓰이는 데, 이것은 숨, 호흡, 하나님의 영, 바람 , 이라는 단어로 구약에서 쓰이는 말이다. 아담의 히브리 원어는 하나님의 영을 담은 붉은 흙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담은 육신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Gas를 채워야지만 시동이 걸리는 자동차처럼, 사람도 하나님의 영을 담아야지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영혼의 빈 공간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채워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라도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자아, 힘, 권력, 쾌락, 물질, 지식, 애정, 사람…. 그러나, 일반 차에 일반 gas가 아닌 디젤을 주입하면 고장이 나는 것 처럼,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운 사람은 고장이 나게 되어있다.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차는 수명이 다한 차다. 이 고장난 사람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성령님이 오셔서 다시 거하실 수 있도록, 죄의 값인 죽음을 당신이 직접 치루시고, 그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셨다. 성령님은 더러운 곳에는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성령님을 늘 모시면서,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후 부터, 여러 가지 없었던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 예전에도 죄를 지으면, 양심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이제는 죄가 밉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마다, 그것이 비록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 여겨져도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방향감각이 생긴다. 무엇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워 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음성을 알아 듣게 되는 감각이 생긴다. 성경을 읽으면, 예전엔 그렇게 지루던 말씀들이 꿀송이처럼 달아지고, 깨달아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달라진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무언가 한주간이 불안해서, 하나님께 얼굴 도장 찍으러 나오는 종교적 관습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목마른 시간이 된다. 예배는 나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교감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내 온 몸과 마음으로 경배하며, 매 순간 마다 세상 속으로 달려 나가는 내 육신의 질 그릇 안에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담는 시간이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에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찌니라(요4:23-24) 하신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이 하나님의 영과 교제 하는 시간이 예배하는 시간이다
예배를 통해서 더욱 내 안이 성령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존귀함이 달라진다. 아무리 금그릇이라 해도 세상 것으로 가득 담겨있다면, 하늘나라에서 그것은 존귀한 그릇이 아니다. 아무리 질그릇이라 해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가득 담겨 있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의 존귀한 그릇이다. 주일 예배는 다시 한번 내 육신을 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움받는 시간이다. 예배의 맛을 본 사람만이 예배를 사모하게 된다. 주일날 드려지는 예배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맛을 보는 시간이다. 그 맛을 본 사람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천국의 맛을 본 사람만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맛을 보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 깊이 있는 개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예배는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한다. Worth(가치) + ship (신분)이 만들어진 단어이다. 즉, 나의 참된 가치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한주간 먹고 사는 문제로, 땅을 보며 살다가, 주일 예배 시간에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래, 나의 삶이 이 땅이 끝이 아니지 하며, 나의 가치가 이 썩어질 육신이 전부가 아니지 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시는 “ 나- 태초의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가면서 예배의 맛이 깊어가야 된다. 천국을 향한 소망이 깊어져야 한다. 육신이 아닌 성령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어야 한다. (육적인) 사람이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는 시간이 예배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