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지금,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요 John 18:37-38, 19:4-5, 14-16>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마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묵 상>
죄인된 인간 빌라도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네가 왕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때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빌라도는 정말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향한 삶을 살아가려고 진지한 자세로 물은 것이 아닙니다. 네가 동족에게 고소를 당해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의 상황에서 진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라는 물음입니다.
1)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진리, 생명의 진리, 소망의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 자신이 진리라는 뜻입니다.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만이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하,32)고 가르치셨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과 거짓을 따라 사는 사람의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진리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못하도록 하며 나아가 거짓을 진리인냥 따르도록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온갖 사교와 거짓에 빠져서 파멸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은 진리되신 예수를 좇는 삶으로 사십시오. 구원과 참 자유와 평강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물질, 지위, 명예, 지식, 삶 전체가 예수께 속해 있을 때 가장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2. 빌라도는 예수께 채찍형을 가하고 군병들은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혀 유대인들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 마음대로 때려 피투성이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별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여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 혐의가 없음에도 애꿎게 고발당해와 나를 귀찮게 만든 사람 정도로 예수님을 취급했습니다. 자기가 놓아 줄 수도 있고 처형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께서 날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성육신 하신 분이심을 고백하시며 믿으십니까? 아니면 성현 중에 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그 분이 날 택하셨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내가 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잘 것 없는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세상이 어찌 여기든지 여러분은 이 사람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나의 구원의 주이심을 고백하시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는 나의 왕이 되십니까? 아니면 빌라도 처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너희 왕입니까? 내 마음대로 취급 할 수 있는 정도의 왕입니까? 만일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면, 경외하며 받들고 그의 통치에 따라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대표하는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 '이 사람', '너희 왕'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된 우리에겐 이 세 가지가 하나요, 즉 진리가 예수요, 성육신 하신 이 사람이 예수요, 너희 왕이 예수이며 나의 구원의 주시요 나의 왕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 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소망 중에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들과 빌라도
<요 John 18:28-32, 37-38>
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즐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묵 상>
1.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만 있었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만 있었지 선민의 사명은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었던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였고, 이들은 천사도 부활도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믿었으나 형식과 의식이 중요했고 근본 내용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없는 종교인, 말씀 없는 신앙인, 형식적인 겉 껍데기 신앙인이었기에 자신들의 죄가 들어나고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와 부를 지키기 위해 메시야를 처형했던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예수를 증오하며 죽이려는 악함이 가득한데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면 더럽힘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럽힘 받고 유월절 잔치를 먹기를 원하지 않아서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형식적인 태도를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예수님이 계십니까? 말씀이 살아 여러분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납니까?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고 성령님께 자리를 내어드립니까?
2. 빌라도는 실리와 명분을 추구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세상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아내도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치 말라는 조언도 받았습니다. 양심도 있어서 예수님의 무죄를 여러번이나 증거하며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또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명패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칠 것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내가 쓸 것을 썼다고 주장하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실리와 명분을 위해 잔머리를 굴립니다. 자신의 위치와 권한으로 무죄한 예수님을 석방 할 수 있었습니다. 관정과 밖을 여러 차례 오가며 일을 처리합니다. 유대인들의 동정을 바라기 위해 심한 채찍형을 가해서 초죽음이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놓아 주기를 바랬습니다. 유월절 특사로 예수님을 석방하지 않고 바라바와 예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결국은 잔머리 굴리다가 정치적인 굴레를 씌워서, 즉 유대의 왕은 가이사인데 유대의 왕이라는 예수를 처형하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에 예수의 처형을 허락합니다. 기회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예배 때에도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시고'라고 빌라도를 예수를 죽인 자로 선언합니다.
실리와 명분을 추구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의 처세술은 공의와 진리를 버립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을 경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 John19:17-22>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를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묵 상>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18:30)로 고소하면서 십자가 형으로 죽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에겐 적용할 수 없고 노예나 타민족의 행악자(반란을 일으킨 자)에게만 적용하는 형이었습니다. 당대의 Cicero는 십자가 형에 대해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죽일 수 있는 다른 형들도 있었는데 왜 십자가 형을 요구했을까요?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씀(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한 죄, 불순종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할 것을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이심을 말씀으로 이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죄악이 들어나고 위선자임이 밝혀지니까 예수를 죽이되 행악자로 십자가에 극형으로 죽여야 자신들의 죄가 가리워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1. 십자가의 메세지는 내가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죄를 회개하고 나의 고집과 교만과 헛된 꿈과 분노와 시기와 야망 ... 등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2. 십자가의 메시지는 죄인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한없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3. 십자가의 메시지는 어린양의 제사입니다. 제사는 죽음의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내가 죽은 것입니다. 또한 참된 예배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제사로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내가 죽고 온전히 주님만이 높여지고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4. 십자가의 메시지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에 대한 도전장입니다. 주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의와 영생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우리 속에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지녔을 때 세상은 복음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Pax Romana를 위해 닦은 도로는 오히려 로마의 멸망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들고 그 길을 따라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들고 우리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회복의 역사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 Isaiah53:1-6>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묵 상>
본문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승리를 노래한 장입니다.
1. 여호와의 종은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배척 받고 멸시 당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구절은 이사야와 또 다른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백성들이 믿었느냐는 물음입니다. 메시야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메시야를 통해 나타났건만 무지한 우리는 그 메시야를 모르고 멸시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지한 백성임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선지자들이 외친 메시야가, 여호와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 메시야가 환영받지 못하고 멸시를 당했습니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연약하고 볼 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강하고 멋 있어야 환영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순이 자가 강한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보기에 볼 품 없고 연약했으나 죄와 사망을 무기 삼는 사탄의 권세를 파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승리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나온 싹은 온 땅을 적셔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와 그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보잘 것 없음이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실 기회요 영광을 이루실 기회임을 아십니까? 강해지려고 하지 말고 사람의 눈에 인정 받으려고 하지 말고 고난의 그리스도와 연합하십시오.
2. 여호와의 종은 왜 고난 당하셨습니까? 그는 질고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맞으며 고난 당하셨습니다. 찔리셨습니다. 상하셨습니다. 징계 받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그만큼 잘못했기 때문이고, 그만큼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여호와의 종이 당한 고난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받으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다는 사실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v.6).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 처럼 우리에게 담당하도록 주신 고난이 있습니다. 즉 주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 고난 당하면 이웃과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슴을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자가 되지 맙시다. 성공병에 시달리는 현대에서 우리가 비록 약하고 볼 품이 없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있음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과 슬픔을 잘 담당하면 치유와 회복 그리고 영광의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고난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고난은 승리로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닌다.
<요 John 20장>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묵 상>
본문과 복음서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요한, 제자들, 도마, 등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오백여 형제가 일시에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확실합니다. 주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 보다 부정하는 것이 훨신 더 어려우며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굳게해 줍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소문을 퍼뜨린 대로 제자들이 주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인봉한 무덤의 돌문 앞에서 삼엄하게 지키던 경비병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다급하고도 위험한 상황 중에서 주님의 시체를 둘렀던 세마포와 머리의 수건이 정돈되어 놓여 있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아멘.
2. 부활의 주님을 만남이 중요합니다. 주의 시체를 보러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를 만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두려워 문을 잠그고 한 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를 만난 후, 용기와 담대함과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의 주를 만나고 확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Damascus 도상에서 부활의 주를 만나 그리스도의 증인(순교자)이 되었습니다.
슬픔, 두려움, 의심, 등은 결국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증상들이며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무기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과 두려움과 의심이 떠나가고 기쁨과 담대함과 확신이 찾아 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3. 부활의 주를 만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가지십시오. 본문에서 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주를 사랑하는 열정을 가진 자들 이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께 모두 나를 내어드림으로 성령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 의지하십시오.
또한 예배하는 자가 되십시오.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가지고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주 앞에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회개가 있을 때 주께서 기뻐하시며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활의 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요 John 21: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니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묵 상>
주님의 부활을 맞은 후, 첫 주일을 맞아 성도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끝을 맺고 있으나, 요한복음은 부활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찾아 만나 주시고 또 특히 베드로에게 사도권을 회복시켜 주시는 내용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1.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 만나 주시고 숯불가로 초대해 주셨듯이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시며 초대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사랑의 주님, 은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2. 부활의 주님은 앞서 행하시며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필요한 장작을 이삭에게 지우고 모리아 산을 오르는 동안 하나님은 숫양을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길갈에 진치고 여리고성을 젊령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앞서 보내셔서 만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매일 그 성을 한바퀴씩 돌고 마지막 7일에 일곱번을 돌고 일제히 함성을 지를 때에 여리고성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전도자 사도 바울을 세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도 주님은 미리 동역자들을 준비해 놓으셨고 로마의 황제를 통해 도로도 미리 닦아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신뢰하고 따를 때에 우리 주님은 앞서 행하시며 예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에도 학업에도 앞서 행하시며 예비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3. 예수 없는 삶은 어둠이요, 예수 없는 힘쓰고 애씀의 노력은 탈진과 헛된 것 뿐입니다. 사람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에는 배와 그물이 안보이는 적당한 깊이의 물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며 그물을 내리지만 헛된 수고와 지친 몸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배의 오른쪽으로 그믈을 내리라는 방법에 따라 그물을 내릴 때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낚은 풍성함과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사업과 학업에 말씀에 따라 사는 삶 가운데서 153마리의 기적과 풍성함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 본문은 주께서 처음 베드로에게 같은 장소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시겠다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심을 증거합니다. 선교는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153마리의 기적을 체험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John 21:15-19>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묵 상>
부활하신 주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숯불을 지피시고 떡과 생선이 놓인 식탁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조반을 마친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 물으셨음니다. '숯불가 식탁'에 둘러 앉은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심한 부끄러움과 죄책감, 실패와 좌절로 인해 심령의 상처를 안은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은 상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수 있으나,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고 있기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1. 주님의 물음은 제자들을(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며 소생시켜주시고 제자의(주님의 자녀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죽기까지 너를 사랑했다." "이렇게 부활한 후에도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영원히 너를 사랑할 것이다." 라고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세번의 물음은 물음이 아니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세번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 주님의 고백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우리의 세번의 화답하는 과정을 통해 침체되었던 영혼이 치유,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권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윗 처럼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2. 주님의 물음 속에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해 주신다는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세번씩이나 자신이 지어준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이 적당치 않지만 아무리 부족하고 실패한 모습의 사람일찌라도 그대로 받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떠한 실수와, 어떠한 허물과 죄를 지었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를 사랑하겠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물음 속에는 이 세상의 무엇 보다 우선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는 뜻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모든 것이 온전해집니다. 찬양도, 기도도, 설교도, 섬김도, ... . 세상의 학위도 저술도 논문도 중요하지만 학문을 사랑해야 모든 것이 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도 평등도 평화도 중요하나 인간을 사랑함이 더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함이 중요하나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그래야 인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무엇 보다 주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온전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