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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욕심과 불순종이 낳은 가인과 아벨 실수(失手)일까요. . 이후로 사람은 항상 하나님 뜻대로 말씀대로 살 수 없게 되었으니 실수(失手)하면 당연시 합니다 허나 수(數)에는 실수(實數)와 허수(虛數)가 있고 유리수(有理數)와 무리수(無理數)가 있습니다, 유리수에는 정수(整數)와 소수(素數)가 있어 수많은 별들을 다 헤아리다가 하나라도 빼먹는 실수(失數)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실수(失數)존재는 어찌하지요 그 의미는 어찌하고 그 빛남은 어찌하란 말인가요. 새상은 실수(失手)에 연 연 하지 말자. 실수(失手)하는 것이 사람이다. 불완전한 것이 당위가 되었지요 실수(失手)가 사람을 흐리게도 하지만 아름답게도 하는 것은 예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죠. 수많은 사연들이 실수(失手)아닌 것이 없고 실수(實數)속에 실수(失數)가 섞여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수(虛數)라고 부를 수 없는 결코 실수(失手)라고 조롱할 수 없는 실수(失數)가 섞여 있습니다.. 자, 일어나 갑시다. . 오늘의 실수(失手)를 내일에 디딤돌로 삼아, 주야장천(晝夜長川) 무리수(無理數)로 달려갑시다.
- 어찜인고
우리 집 앞마당에 대략 25년된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다.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에서부터 공수되어 고센서광교회 창립 때 심었던 것인데 업스테이트 뉴욕이라 혹독한 겨울에 견디지 못하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생존한 나무를 집으로 옮겨 심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큰 나무로 자라 집을 나설 때마다 바라보곤 한다 봄에 잎이 나고 여름에 꽃이 피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가을이 되어 빨갛게 익어가면 마음이 즐겁고 감사가 넘친다 어느 해인가 가지치기를 잘못하여 꽃이 피지 않았을 때 왠지 마음이 불편하였다 한 그루의 나무일 뿐인데도 꽃과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에 시비가 갈리는데 이 가을에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면서 무슨 생각하실까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어찜인고 하신다면 나 어찌할까 두렵도다 이 가을 열매 익는 계절이
- 가을, 하나님의 작품이네
뜨거운 태양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밀려가고 울긋불긋 화려하게 물드는 계절 연륜의 깊이 세월의 흔적 드높은 하늘 익어가는 열매 진한 삶의 향기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텅 빈 가슴을 채우는 가을 가을 나뭇가지 한 웅큼 안겨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계절 파란 쪽 빛 하늘 뭉게구름 맑은 햇살 빨갛게 노랗게 읽어가는 열매 결실이 문턱에 와있나 보다 계절의 변화는 예정된 섭리 하나님의 작품이네
- "나 그리고 그들"
그리스도를 영접한 나 흔들며 방해하고 조롱하는 무리들 원수 그들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따르는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이나. 그들은 언제나 무리 지어 해하려 합니다. 늘 나 혼자서 여럿을 상대해야 하기에 이 싸움은 힘들고 어렵고. 괴롭고 외롭지요 세상에서 종살이 노예 계속되는 광야 생활 끝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주님을 만났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심한 고통과 고난은 있었으나 악한 원수가 주님을 이길 수 없지요. 순간 그들이 이긴 것처럼 보였고. 잠시 지배할 수는 있지만 저들의 세력은 지붕의 풀처럼 뿌리를 내릴 수 없어 자라기 전에 넘어집니다.
- 예배로 승리하는 9월의 교회,.월삭 예배에서..."여리고의 성의 정복의 비밀은 예배"(수 6:1-21) 견고한 성읍을 함락 시키는 군사적인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전략.... "예배의 삼대 요소 기도 말씀 찬양"
여리고 성 함락 삼대 전략... 첫째. 치밀한 계략을 세워서 주거지 성안에 몰래 진입한 뒤 성문을 열고 아군을 끌어들여 정복하는 방법. 둘째. 성곽 가운데 가장 취약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면 돌파해서 성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방법. 셋째. 오랫동안 성 주변을 포위해서 물이나 양식을 차단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 예배의 삼대 요소... 제사장이 멘 언약궤는 말씀을 상징이다. 나팔을 불었다는 말은 찬양이다.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는 것은 기도를 상징한다. 9월의 월삭예배에서 ... 여리고성을 정복해야지만 가나안 땅의 여러 성읍들을 향하여 진격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여리고성은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이 얻은 첫 번째 열매요 첫 번째 희생 제물이기도 했습니다.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성별해서 바쳐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리고성 역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첫 번째 열매이기 때문에 17절 말씀에 보면 여리고성과 그 성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기생 라합과 그 여인의 집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살려두지 말고 도시 전체를 불로 태워 진멸하라고 했습니다(24절). 바로 첫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지요. 여리고 성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축성기술이었지요. 하지만 이 철옹성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졌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대에 이와 같이 견고한 성읍을 함락시키는 군사적인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희랍에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아주 치밀한 계략을 세워서 주거지 성안에 몰래 진입한 뒤 성문을 열고 아군을 끌어들여 정복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성곽 가운데 가장 취약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면 돌파해서 성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셋째 방법은 꽤 오랫동안 성 주변을 포위해서 물이나 양식을 차단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이 함락된 것은 이런 전형적인 방법들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하나의 예배요 제의를 통해 어이없이 무너졌습니다. 제일 먼저 수6:1절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성문 안과 밖이 다 굳게 닫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리고성의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를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데 이스라엘의 포위작전까지 내다보고 성안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제일 처음 만난 난공불락의 요새가 여리고성이었는데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전쟁이라는 것이지요. 승리할 것이라는 전제의 결과를 미리 보장받고 하는 싸움입니다. 지금 현재 여리고성은 안과 밖이 다 굳게 닫혀 있습니다. 어떤 인간의 방법을 써도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닫힌 성문을 보지 말고 그 문의 열쇠를 쥐고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이 그 여리고성을 우리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지요. 어떤 여리고성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붙이셨으므로 반드시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여리고성은 무너져있습니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주시기 위해 군사 전략으로 볼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수6:3-5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주십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께서 주신 책략은 너무나 비전투적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이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돌라는 것입니다. 한 바퀴 삥 돌아서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오라는 것이지요. 다만 일곱째 날은 한 바퀴만 돌지 말고 일곱 번을 돌라고 했습니다. 여기 일곱이라는 숫자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7이라는 숫자는 성수(聖數)요 천수(天數), 완전수(完全數)이지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하루 한 바퀴씩 모두 여섯 바퀴를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 도합 13바퀴를 돌다가 마지막 날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부를 때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참 황당하고 무모한 말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 보세요. 이렇게 7일 동안 총 13바퀴를 도는데 그냥 함부로 도는 것이 아닙니다. 전열을 분명히 해서 돌라고 했습니다. 수6:6-21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정중앙에 섭니다. 이와 같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가장 앞쪽에는 무장한 선발대가 앞서 갑니다. 바로 그 다음 열에 일곱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면서 선발대를 뒤따라갑니다. 그리고 정 중앙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걸어가고 맨 뒤쪽에는 후발대가 뒤따르고 바로 그 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갑니다. 정중앙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바로 앞쪽에 일곱 양각 나팔을 부는 일곱 제사장이 있습니다. 이 언약궤와 바로 앞 쪽에 위치한 일곱 제사장을 호위하기 위한 선발대와 후발대가 앞과 뒤에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중심부를 뒤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성 주변을 돌 때 일체의 함성을 지르지 말고 침묵하라고 했습니다. 오직 일곱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들만 행군하면서 나팔을 불고 일반 백성들은 아무 소리도 발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여리고성이 무너지기 전 놀라운 사실을 하나 지적해야 합니다. 여리고성을 돌 때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이 절대로 게으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공격 태세도 갖추지 않고 그냥 성 주변만 돌라는 말은 굉장히 소극적인 말입니다. 아침 늦게 일어나 천천히 해도 될 일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누구보다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수6:12절을 보세요.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15절을 보세요.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서." 여리고성은 분명히 하나님이 무너뜨리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아주 수동적이고 나태하게 이 하나님의 일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새벽 일찍 일어나 부지런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여리고성을 하나님께서 허물어주심을 믿는 사람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제 7일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일곱 번째 돌다가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 성이 떠나가도록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수6:20절"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난공불락의 요새,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철옹성 여리고성이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려는 교훈이 중요합니다. 그 교훈은 세 가지입니다. 믿음과 인내와 순종입니다. 무너뜨리기 어려운 여리고성을 만나거든 하나님이 그 성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 성이 허물어져 우리가 그 성안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는 미래의 장면을 미리 보라는 것이지요. 이미 이겨놓은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치르는 그 어떤 영적 전쟁도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습니까? 그냥 수동적으로 돌기만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의 믿음을 보시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인내해야 합니다. 엄청난 인구가 7일 동안 여리고성을 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며칠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무모하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엿새 동안 날마다 돌았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징조는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6일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사기충천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도 무너질까 말까인데 끽 소리하지 말라니요. 인내에 한계가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마지막 날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선발대는 선발대의 사명을, 후발대는 후발대의 사명을,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언약궤를 메고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침묵하고 함성 지르고, 인내하며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7일만이 아니라 한 달, 일년, 10년을 돌라고 해도 돌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다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는 사람은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순종할 때 무너집니다. 아주 기발한 전술전략을 세우고 기병대와 특공대를 앞세워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성인데 빙글빙글 돌기만 하라니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코웃음을 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돌라면 돌았습니다. 한 바퀴 돌라면 한 바퀴 돌고 일곱 바퀴 돌라면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 침묵하라면 침묵했습니다. 함성을 지르라고 했을 때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순종했더니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여리고성 함락 작전은 하나의 예배요 종교적인 의식이었습니다. 전쟁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배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중심 역할을 합니다. 행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언약궤가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불었던 양각 나팔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도 되었지만(욥 39: 25), 예배에 있어서 두드러진 기능을 했습니다(대하 15: 14). 여리고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무너졌습니다. 예배의 세 요소는 말씀와 기도와 찬송입니다. 제사장이 멘 언약궤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나팔을 불었다는 말은 찬송했다는 말입니다. 찬송할 때 마귀가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찬송 부를 때 여리고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침묵을 지켰다는 말은 묵언정진, 묵상기도를 말합니다. 때로 우리는 입을 닫고 조용히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는 말은 통성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성도는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묵상기도이든 통성기도이든 기도할 때 승리합니다. 뜨겁게 기도할 때 여리고성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외부에 있는 여리고성보다 더욱 더 무너뜨리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여리고성입니다. 불신앙과 조급함과 불순종의 여리고성이 더 큰 문제입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여리고성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 25)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여리고성도 무너집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내면의 여리고성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 물의 심판
늘 봄처럼 따스한 기운이 대기에 가득 포도 한 송이 두 사람이 어께에 매고 왔던 천년 가까이 살던 기름진 땅에 맑은 하늘 언약 하나 기약하고 잣나무로 배를 짓는다 하늘 문 열어 허망한 소망 쓸어내겠다는 말씀 우주에서 온 나쁜 기운 물결로 막아주던 하늘의 물 초목 풍성한 동산에서 비. 홍수라는 단어를 모르던 때에 뚜닥 뚜닥 바지선을 짓는다 모든 명 준행 하니 지금부터 칠일 후에 비가 내리리라 하늘 문 열려 비가 땅에 쏟아지니 하늘 문 닫아 막고 그 물들 북 끝과 남 끝에 쌓아 편무적 언약이 보편적 언약으로 변화하니 무지개를 증거로 주셨다
- COMPASSION
왼팔 어깨죽지 아래에서 허리 사이 그 중간에서 점화되어 왼편 등으로 어깨와 팔 그리고 목 위 왼쪽 귀 뒤편을 따라 머리 정수리로 화산이 분화하여 폭발 하는 순간까지 그 고통은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이 나에게 찾아온 영적 대상포진이다 COVID-19 시작한 초기 2019년 3월에 고열로 병원을 두 차례 방문하여 진단받았으나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은 그날 밤에 고열로 인하여 혼수상태가 되어 앰브란스로 병원에 입원 조치 되어 4월 퇴원하기까지 생사를 오락가락 할 만큼 고통이 따랐으니 지옥도 천국도 경험했다 이후 전무후무한 영적 팬더믹의 고통이었다. 언제부터 인지 기억할 수는 없으나 젊은 시절은 아닐 것 군에서 유격훈련은 물론 공수 특전 훈련까지 감당하였으나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숨차고 가슴 아파오는 것을 운동부족이리라 그때마다 애써 극복하려 하였으나 게을렀다 생각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심장 질환으로 발전하였고 영적 협심증이 되어 맨하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니 지난 2018년부터 시작된 입원과 치료를 반복하게 된 것은 우연은 아니라 필연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범죄에 대한 주의 경고와 심판 회개하라는 메세지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는 전과 같은 죄를 짓지 말라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사랑 Compassion 주의 자비였으니 전에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까지 용서하시려는 주의 적극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었으니 죄의 드러남 숨길 수 없도록 하여 회개케 하셨다. 대상포진 COVID-19 심장질환 등 한 번은 치료 되었으나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라 강력히 권고하셨으니 감사하자 더욱 감사하며 주를 더욱 사랑하리 말씀에 의지하리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리 예수 이름 부르며 십자가의 보혈 찬양하리
- 왔다 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있어 나에 삶이 기뻐합니다. 보석 같은 주의 사랑이 있어 내가 존재합니다. 너무 복잡한 세상 굴곡진 삶에서도 주를 향한 사랑이 나를 이끕니다. 비탈길 인생으로 살았지만 나름 주님 주신 은혜로 왔다 갑니다. 마음속에 욕심 나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함께 갑니다. 저 천성을 향한 나의 삶에서 예수님 십자가가 있어 감사했습니다.
- 2024 나이스크 패밀리콘퍼런스 코리아,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한국 전남 광주
광주CBS 한세민 / 2024-08-09 16:19 나이스크 패밀리 컨퍼런스 스텦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세민 1993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해 세계 여러 교회들과 예배회복운동을 펼치고 있는 나이스크월드미션( N yskc W orld M ission/총재 피종진, 대표회장 최고센)의 광주전남본부(본부장 윤구현 목사)가 8월 5일(월)~7일(수) 사흘간 광주바이블칼리지(전남 담양군 무정면 중리도동길 42-34)에서 '예배회복 교회연합 수련회인 '2024나이스크 패밀리 컨퍼런스 코리아'를 개최했다. 2024 나이스크 패밀리 컨퍼런스에 참가한 강사들과 목회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세민 "네가 낫고자 하느냐(Wilt thou be made whole)는 주제로 열린 이번 컨퍼런스는 NWM 총재 피종진 목사와 대표회장 최고센 목사, 사무총장 김은목 목사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황디모데목사 GTS 교수 강효열 전남수등이 강사로 나서 전 세대를 대상으로 나이스크 신앙의 5대 강령 중심으로 강의했다. 나이스크 패밀리 컨퍼런스 참가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한세민 준비위원장 김근임 목사(금호소망교회)는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며 "컨퍼런스를 통해 교회의 본질인 예배가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컨퍼런스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총재 피종진 목사는 "나이스크( NYSKSC ) 신앙의 5대강령은 예배회복을 위한 다섯가지 신앙생활 신조이자 행동강령이다"며 "영혼의 호흡인 새벽기도( N ew life)와 영혼의 양식인 성경애독( Y ielding for manna), 성도의 열매인 개인전도( S alvation for one by one), 성령의 교통인 성수주일( K eeping for Lord's day), 축복의 도리인 일조전납( C omplete offering)에 힘써 예배회복운동에 앞장서는 나이스크인(nyskcian)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내 삶의 못
이미 박혀져 버린 세상을 향해 박아버린 못 들은 좀처럼 벽에서 뽑혀지지 않는다. 세상이 가르친 고집인가, 내가 키워낸 아집인가. 무언가 걸기 위해 박아댔던 못 들은 뽑혀지지 않은 채 흉터가 되어버렸다. 시간이 문득 흘러, 새로운 못들이 생겨나 갈 때 쯤 과거의 못들을 보니 녹이 쓸어있었고 쓸쓸해 보였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져 본 그 못 들은 차가운 아집도 딱딱한 고집도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박아 대던 나의 아픔들이었고 외침들이었고 내가 만들어낸 부끄러워했던 못들이었다. 그 못 들은 추억이 되었고 배움이 되었으니 이제 다시 그 못 들을 의지하여 내 삶을 걸어본다.